‘실미도의 다짐, 승화시키자 우승으로’

곳곳에 붙은 격문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지난달 28일 경기 안산의 와동체육관. 2005 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 꼴찌를 한 신한은행의 훈련이 한창이었다. 격렬한 몸싸움에 하나둘 코트로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실전을 방불케 한다.

-하루 8시간 지옥훈련 소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코트의 미녀’, ‘천재 가드’로 불리며 여자농구의 인기를 이끌었던 간판스타 전주원.

1972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서른넷이다. 9일이면 8개월되는 딸아이를 가진 주부이자 신한은행의 코치. 그가 다시 농구화 끈을 조여맸다. 코트로 복귀를 결정한 뒤 조카뻘 후배들과 뒹굴며 구슬땀을 흘린 지도 벌써 한 달여가 지났다. 팀의 막내인 김연주, 정안영이 86년생이니 열네살 차이다. 지난 겨울까지 “코치 선생님”이라고 불리던 전주원이 다시 ‘언니’로 돌아온 셈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코트를 벗어난 그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왜 안 힘들겠어요. 엄청 힘들어요.” 얼굴은 땀으로 범벅돼 있었지만 미소 띤 표정에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아침 6시에 체육관으로 나와 2시간 동안 500개의 슈팅 훈련, 오전 웨이트트레이닝과 속공 연습, 오후 1대1 연습 및 실전플레이 등 하루 7~8시간의 강훈련을 후배들과 똑같이 소화하고 있다.

지난해 1월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ABC) 대회가 마지막 출전대회였으니 1년 넘게 뛰지 않은 셈이다. 지난 겨울리그 신생팀으로 야심찬 출발을 한 신한은행은 고비 때마다 해결사 부재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12번 당한 패배 중에 5점차 이내로 진 게 7번. 그 중 절반만 건졌더라도 플레이오프 진출은 무난했을 것이란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딸 수빈이 자꾸 보고싶어-

“경기는 1~2점차로 왔다갔다 하는데 속은 타죠. 벤치를 둘러보면 전코치밖에 눈에 안들어오더라고요.” 이영주 신한은행 감독의 얘기다. 코트복귀를 결심했을 때 가족들은 뜯어말렸다. “그 힘든 일을 왜 다시 하려고 하느냐”고.

그러나 팀의 절박한 사정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결혼하고 운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 특히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충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다. 집에 갈 수 있는 날은 1주일에 딱 하루. 토요일 오전 훈련이 끝난 뒤 숙소를 나섰다가 일요일 오후엔 다시 짐을 싸야 한다. “딸(수빈)의 얼굴이 하루에도 몇번씩 눈에 밟힌다”고 말하는 전주원의 눈가엔 옅은 물기가 스쳐지나간다. 아직 말은 못하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딸에게 하루 한 번 전화하는 게 최고의 낙이다.

기왕에 다시 시작한 운동인 만큼 대충대충할 수는 없는 노릇.

-국가대표 또 뽑히면 고맙죠-

“무엇보다도 제 자신이랑 싸우는 게 가장 힘들어요. 감독님은 천천히 하라고 하는데 막상 운동을 다시 시작하니까 욕심이 생기더군요.” 경남 사천, 실미도를 돌며 지옥훈련을 끝까지 버텨낸 뒤 자신감을 많이 찾았다. 스스로 얘기하는 현재 컨디션은 전성기 때의 70~80%. 여름리그가 개막할 즈음이면 100%에 가깝게 몸상태가 만들어질 것 같다고 귀띔한다.

“현역때보다 더 독하게 마음먹고 있어요. 힘들어하면 어린 후배들이 ‘코치나 하지 왜 돌아왔냐’고 할 거 아니에요.”

인터뷰가 끝날 즈음 “혹시 국가대표에 뽑힌다면 뛸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그럴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불러주시면 고마울 따름이죠.”

by 경향신문 안산|조홍민기자